리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먼저 보여줌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솔선수범의 개념은 리더십에 관해 대화를 나누고, 상담을 하거나 가르치다 보면 항시 나오는 화두가 된다. 행동으로 먼저 보여주는 것은 말로 어떤 것보다 학습효과 또한 높다는 것은 이미 일반적으로 아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솔선수범은 크게는 대통령부터 가정의 한 가장까지, 아니면 작은 사조직이라도 리더가 보여주어야 하는 가장 기초적인 리더의 소양인 것을 굳이 부인하는 사람 또한 없으리라 여겨진다. 솔선수범은 리더가 반드시 가져야 하는 중요한 특성인 것은 두말할 필요없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인 리더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위에서 나눈 말씀, 마태복음 5장 19절에서 주님은 가르치는 자에게 주어지는 우선순위와 더불어 경고와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신다. 가르치는 자는 행하며 가르쳐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경고의 말씀이다. 물론 교회안에서의 가르친다는 개념은 쉽게 목사나 교사라는 개념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현대의 교회는 신학적으로나 규모면에서 많이 성장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비해 목사와 교사의 수도 많이 늘었으며 많은 선교사를 해외에 보내고 지원 또한 아낌없이 하는 경우를 많이 때로는 경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기독교 안에서 가르치는 자의 숫자도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숫자 이면의 안타까운 한 면은 교회 다닌다는 말을 창피해서 할 수 없다는 교인의 수 또한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르치는 자의 수가 늘면서도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지 못한 것처럼 느끼는 교인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그 괴리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가장 큰 것은 바로 이 행함과 가르침의 균형이 깨어지고 그 불균형이 심화되면서 보여지는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목사나 교사가 꼭 아니라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마다 제자 훈련과 같은 프로그램 속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는 성도들도 많고 “가서 제자 삼으라”라는 찬양을 부르며 전도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프로그램 개발과 교육 개발에도 힘을 쓰고 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역사에 관해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등경위의 빛이 되어 우리의 행함을 세상에 보여줌으로 세상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그렇기에 그리스도인 된 우리들에게 행함은 단순한 리더로서의 솔선수범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마느냐 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세상과 구별된 크리스천 리더에게 솔선수범이란 세상의 것과는 구별된 기준과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크리스천 리더가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행함의 종류
말씀은 분명히 행하고 가르치라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행함의 의미는 무엇일까? 행함은 행동적 행함과 비행동적 행함이라는 두가지로 단순 분류가 가능하다. 행동적 행함은 육체적 행동을 통한 행동일 것이고, 비행동적 행함은 표정, 언어, 의도 등과 같은 직접적 육체적 행동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내포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선행이나 그와 반대되는 불친절한 행동 등과 같은 행동적인 행함은 쉽게 이해도 되지만 흔히 그러한 것들 만을 행함의 범주에 넣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비행동적 행함도 분명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있습니다. 아마도 비행동적 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형제를 향한 분노를 가지고 있거나 바보 또는 미련하다 험담하는 경우가 될 것이다. 때로는 어처구니없다고 쳐다보는 것차도 행함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2
크리스천 리더는 이 두가지 행함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바로 행하며 가르친다”라는 개념에서의 행함이 바로 이 행동적 행위와 비행동적 행위를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지는 말자!
그렇다고 행하고 가르친다는 개념속에 완벽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여 행함이 온전하지 못함에 스트레스 받지는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 어차피 인간은 완벽하지 못한 존재이고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는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바로 “나는 예수안에서 나아지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즉 예수가 될 수도 없고 그렇게 완벽해질 수도 없지만 예수를 닮아가는 성장을 거듭하고 있느냐 라는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고 실수투성이의 어린아이 같지만 나날이 성장하며 어른이 되어져 가고 있느냐? 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11
하나님 외에는 완벽이라는 정의가 성립되는 존재는 없다. 그렇기에 어차피 우리의 목표도 “완벽(perfectness)”이 될 수가 없다. 하지만 끈임 없는 말씀에 자신을 비추며 자기점검과 훈련속에서 성장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주님안에서의 성장이고 성화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같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애쓰고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속에서도 감동을 찾는다. 그러니 행하며 가르친다는 것은 완벽함의 문제가 아니라 주안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느냐, 나아지고 있느냐는 문제가 된다. 완벽하고자 스트레스 받지는 마라. 사실 성경적으로는 우리의 삶에서 완벽을 포기하는 것이 맞다. 어차피 부족한 우리는 완벽한 삶을 살수도 없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묵상하며 해야 하는 질문은 완벽한 행동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예수 닮아가는 성장”을 하고 있느냐가 되어야 한다.
행하며 가르치는 우리가 되기를…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가르치는 사람이다. 우리 모두는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 때로는 삶속에서 성령의 운동하심을 보여주는 자로, 삶속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세상을 향한 빛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솔선수범적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우리가 마태복음 5장 19절의 말씀처럼 입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하며 가르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하며 가르치는 자가 되게 하시어 세상에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천국에서는 큰 자라 칭찬받는 모습의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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