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리더십 2. 겸손의 리더십
Theme 2-1. 교만으로 시작된 죄의 역사
예수님의 선명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WHY”를 이해함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라보는 자신의 사명에 관한 생각과 틀을 어느 정도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바로 그 “WHY”를 이루기 위한 삶이었으며 분명한 그 목표 또한 이루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예수님의 성품, 자세와 행동의 근간을 좀 더 가깝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는 목적 있는 리더의 전체적 삶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그 “WHY”라면 그것을 이루어가는 자세와 행동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접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그 답이 “겸손의 리더십”이라는 쉽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마 11:29)”라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모습에서 겸손을 배우라 하시지만 그 “겸손”이라는 것은 단순한 높고 낮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WHY”가 어떻게 실현되며 어떻게 마무리 되는가에 대한 현실적 이해에 대한 문제이며 그것의 이해를 통해 우리는 “예수 닮아가는 삶”에 대한 숙제를 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WHY”를 가지신 예수님의 사역의 기초가 “겸손의 리더십”이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겸손의 반대인 “교만으로 시작된 죄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교만의 사전적 의미는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이며 유사어로는 “오만, 거만, 방자”등의 단어가 있습니다. 자신을 주위 사람보다 높게 여기고 남을 아래로 보는 사람, 잘난 척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태도를 교만이라 합니다. 한 운동선수가 승리는 자신의 공이라 하고 패배는 다른 동료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교만이라고 하고, 자신의 지식을 뽐내며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교만하다 이야기 합니다. 한마디로 교만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거나 다른 사람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만이라는 단어의 뜻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그 뜻을 잘 알고 있으며 단어만 들어도 감정적 반응이 일어날 만큼 설명이 필요 없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b) 이유와 왜 교만이 죄의 시작점이었는지를 이해하려 한다면 선악과에 대한 기록이 아마도 가장 쉬운 자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딱 하나의 룰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라며 축복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정복하라 말씀하시며 창조 하신 모든 채소, 모든 나무, 모든 동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세기 1:28~30
하지만 에덴에 있던 생명나무를 포함한 그 수많은 나무에 열리는 열매들 중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리는 선악과는 먹지말라 하셨고 그것을 먹을 때는 정녕 죽으리라는 단 하나의 룰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모든 것은 다 주시면서 단지 그 선악과만은 먹지말라 정하신 하나님에게는 분명 어떤 뜻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순종을 통한 자발적 관계 형성입니다. 사랑은 강제가 아닌 선택일때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제적 관계가 아닌 자발적 선택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진정으로 온전한 관계이며 그러한 관계야 말로 사랑을 근간으로 한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단 하나의 법을 세우시고 첫 인간이었던 아담이 그것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자발적이며 온전한 관계가 성립되기를 바라셨으며 그 안에서 가능하게 되어지는 사랑의 교제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유일한 룰에 순종함으로 아담은 로봇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신뢰와 평화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정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단순한 피조물인 인간과 자발적 선택을 통한 신뢰와 평화의 교제가 가능한, 강제나 억지가 아닌 순수한 사랑의 교제가 가능한 관계를 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의 인지와 인정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이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는 신격 정체성의 인정, 자신은 피조물인 것에 대한 정체성의 인정, 절대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세의 정립,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정립, 복을 주는 자와 복을 받는 자로서의 관계 정립 등과도 직결된 모습입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의 기초 조건이 되듯이 피조물인 인간은 자신의 그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인지와 인정을 통해 창조주와의 관계가 정립되고 투명해짐과 동시에 관계의 안정성을 가지게 됩니다. 아담의 경우 그것은 순종이라는 행위가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으로 그는 창조주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인정하고 있음을 증거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축복을 감사로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삶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순종의 첫번째 의미가 자발적 선택에 의한 교제의 시작점이었다면 그 두번째 의미는 하나님을 창조주로서 인정하는 피조물로서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삶속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안정적 관계 유지의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의미는 창조주의 절대 권한에 도전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분명히 좋은 과실을 맺는 수많은 나무가 있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나무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포함한 모든 나무의 열매는 먹어도 된다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16~17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시며 누리게 하고 싶으셨던 사랑이라는 특성을 가지신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 단 하나의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는 단 하나의 법을 정하신 이유 또한 그 마음에서 출발하셨습니다.
선과 악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알고 모름의 문제를 뛰어넘는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법을 세우고 정죄와 심판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모르면 법을 세울 수 없듯이 선과 악을 안다는 의미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을 세울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또한 “법”을 세운다는 의미는 “정죄와 심판”의 권한과 직결되어져 있습니다. 즉 선과 악을 알아야 법을 세우고, 그 법이 있어야 그것이 기준이 되어 정죄함과 심판함이 가능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선악을 앎”이라는 것은 권리와 자격이 있는 존재, 전지전능한 존재만이 가져야 하는 지식이며 능력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능력은 온전한 용서와 회복의 능력을 가진 존재의 것이어야 하며, 정죄와 심판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전지한 (omniscient) 존재만이 실수없이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전능한 (omnipotent) 존재만이 완벽히 소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선과 악을 구별함에서 시작되는 법을 세우며 정죄와 심판하는 권한은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며 절대자인 하나님만이 가져야 하는 절대권의 범주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그 경계선을 분명히 함으로 인간이 축복속에 사는 비결, 평화속에서 사랑의 교제가 가능한 세상에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절대권을 상기시키고 그 안에서 거함으로 발생하는 모든 축복을 누리게 하기위해 두신 선악과이기에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즉 법을 세우고 정죄와 심판이라는 창조주의 절대권에 대한 도전하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악에 대한 문제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알아서 법도 세우고, 정죄도 하고, 심판도 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단 하나의 룰을 어김으로 인간은 수많은 축복으로 채워진 하나님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법과 정죄함 그리고 심판이 존재하는 죄의 세상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교만으로 시작된 죄의 역사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3:1b~6
뱀은 하와에게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라며 다가옵니다. 주신 축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먹지 말라”고 한 그 명령만 확대하고 교묘하게 돌려 비판적이며 부정적인 언어로 뱀은 다가왔습니다. 그러한 왜곡된 내용의 질문을 통해 뱀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든 것입니다.
뱀과 하와의 대화를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동산에 있는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열매는 먹어도 된다고 아담에게 이야기 하셨다는 사실을 하와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2~3절). 그러한 하와의 대답에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라며 선악과의 의미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라는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선악과라는 열매 자체에 어떤 엄청난 힘이 있는 것처럼 말하며 선악과에만 집중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만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처럼 왜곡된 내용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 사물 중심의 관점으로 시선을 바꾸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선악과의 사건은 핵심은 열매 자체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한다라는 것이었지만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통해서 선악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 자체만 바라보는 첫번째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초점이 하나님이 아닌 선악과로 바뀐 하와에게 뱀은 “너도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 수 있어!”라며 하와의 자아를 건드립니다. 하나님처럼 될까 봐 먹지말라고 했다는 듯이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선악과만 먹으면 하나님이 없어도 선악을 구분하는 힘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룰을 세우며 하나님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교만의 마음이 들게 한 것입니다.
초점이 바뀌니 자아가 흔들리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흔들리는 하와의 자아는 이제 “하나님께 기댄 자아”가 아니라 “독립성이 강해진 자아”로 바뀌게 되면서 이제는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라는 자기 생각, 자기 마음, 자기 판단을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정말로 자신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탐욕의 마음을 가지게 되며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느낌과 감정, 자신의 판단력에 의존하는 자아를 가지게 된 하와는 스스로를 죄의 굴레 속으로 밀어 넣게 된 것입니다. 하와의 “하나님께 기댄 자아”는 이렇게 “하나님이 필요 없다! 라고 여기는 자아”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유혹에 넘어가 말씀에서 사물로 초점이 바뀌고, 하나님께 기댄 자아가 하나님이 필요 없다 여기는 자아로 바뀌며 하나님의 절대권에 도전하게 하는 교만의 마음이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는 행동으로 죄를 범하게 하고 그것을 아담과 나눔으로 함께 불순종의 죄를 지었습니다. 죄는 그렇게 교만으로 시작되어 불순종함으로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정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초점이 떠나면 기댈 곳 없는 우리의 자아는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게 되고 독립성의 교만으로 우리를 채우려 합니다. 바로 “나”와 “독립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교만이 시작되고 그 교만은 불순종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목적 중심의 리더십”에 관해 나누던 중 “목적 중심의 리더가 조심해야 하는 것들”을 나누며 교만의 위험성에 대해 나눴었습니다. 그리고 교만이 보여주는 여러 현상에 대해서도 기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며 엄하게 경계하시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라며 또 경계하셨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18
교만이 불순종의 출발점이라면 순종의 출발점은 바로 겸손일 것입니다. 겸손이 없는 “순종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모든 행위”는 우리를 범죄하게 만듭니다. 흔히 이야기 하는 주일 성수, 십일조와 기타 헌금, 구제, 섬김 등의 소위 “순종”이라며 행하는 선한 그 모든 것들이 겸손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교만에 빠지게 하고, 스스로를 높이며, 주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범죄의 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헌금 많이 해서 축복받아 잘 산다며 왜 헌금하지 않고 가난하게 사느냐고 상처주는 장로, 큰 교회 건물을 지으며 모든 것이 자신의 업적인양 내세우며 자신이 교주가 되어 버리는 목사, 십일조를 철두철미하게 한다 자랑하면서 직원들의 복지에는 관심도 없는 사장, 구제에 힘쓴다며 한 달에 한번 봉사 가면서 노숙자들에게 더럽다면 타박하는 권사, 선교를 이야기하면서 가족과 이웃에게 재정적 지원을 강요하며 짐이 되는 선교사, 부정부패에 썩어가면서도 성경책을 들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며 지지를 부탁하는 정치인 등과 같이 우리 주변에는 소위 “순종”이라는 가면을 쓰고 범죄하는 분들도 존재합니다. 즉 그들의 행동은 순종이 아니라 “순종의 탈을 쓴 교만”인 것입니다. 아마도 크리스천 리더들, 특히 성공하는 리더들이 빠지기 정말 쉬운 함정이기도 합니다.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잠언 16:5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한 자를 미워하신다 말씀하십니다. “순종”이라는 행위를 함에 있어서도 우리의 “마음”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순종”이 받으실 만한 “순종”이 되려면 “겸손”이 그 바탕에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순종”보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순종”이 어떤 마음, 어떤 자세에서 출발하였는가에 대한 진단의 시간, 묵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의 역사는 하와의 교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과 왜 그리도 그 선악과라는 열매 하나가 큰 의미가 있었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겸손의 리더십”을 이야기하면서 죄의 역사를 먼저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죄의 역사가 하와에게서 시작된 교만에서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그것을 반복하지 않도록 부족한 저의 마음을 지키시고 훈육하셔서 겸손에서 출발하여 순종으로 이어지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그로 인해 주께 칭찬받으며 주와 동행하는 복된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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